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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전자기장 과학 발달의 초석
 
발포인:김혜숙 발포시간:2019-04-11 클릭:

2019-04-10 08:44:25

윌리엄 길버트(1544년 5월 24일-1603년 11월 30일)는 영국의 물리학자이며 의사이다. 자기학의 아버지 또는 영국 실험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윌리엄 길버트는 에식스주 콜체스터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몇몇 기록에 따르면 옥스퍼드대학에서도 공부했다고 한다.

1560년, 학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1569년에 이르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약학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과학의 태두로 잘 알려진 갈릴레이보다 생년월일이 더 빠른 관계로 실제로 최초의 과학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최초의 과학자’이기보다는 ‘자기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있다.

1573년, 길버트는 영국 왕립내과협회의 회원으로 당선되였다. 길버트는 왕립내과협회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무척 성공적이였기 때문에 1599년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좋은 시기를 보냈다. 1601년부터 그가 죽은 1603년까지 엘리자베스 1세의 주치의로 지냈다.

이로써 의학 쪽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화학에도 관심이 있었고 이내 전기와 자기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틀었고 자기에 대한 연구로 물리학에 큰 획을 그었다.

길버트는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의 자기에 대한 연구에 쏟아부었다. 그는 18년의 긴 연구 끝에 1600년에 유명한 저서 《자석에 관하여》를 출판했으며 이는 유럽에서의 전기와 자기의 연구에 기본이 되였다. 당시 유럽인들은 라침반을 사용하여 바다를 항해하였지만 라침반의 자석이 어째서 방향을 알려주는 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라침반이 북극을 가리키는 리유는 북극성 혹은 북극 근처에 있는 매우 커다란 자석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인해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윌리엄 길버트는 지구 자체가 큰 자성체라고 설명하며 그의 생각이 담긴 지구 모형을 ‘테렐라’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며 이것이 라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리유이다.”라고 했다. 이는 지금도 옳은 주장이다.

《자석에 관하여》 제2권에서는 전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는데 그때까지 같은 분야로 취급되던 전기학과 자기학을 각각의 독립된 분야로 나누었다. 이는 또 19세기초에 가서야 다시 전자기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통합되였다.

오늘날 동시대의 과학자인 갈릴레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지만 길버트의 업적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길버트의 업적을 요약하자면 첫째로 전기학과 자기학을 분리하고 베소리움이라는 검전기를 고안해 실험전기학의 틀을 잡았으며 나아가 발산기를 사이에 둔 근접작용으로서 전기력의 모델을 만들어 실험과 리론 면에서 정전기학의 출발점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지구 자기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셋째로는 지구가 본원적 형상으로서 자성을 가진 활성적인 존재라는, 자기철학을 제창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반세기 전에 제기된 지동설 즉 지구가 스스로 운동을 한다는 주장에 대해 자연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부여했다.

이 마지막 사실과 관련해서는 현대과학의 발상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리유로 과학사에서는 거의 무시되여왔으나 17세기 전반, 근대 물리학과 근대적 우주상이 등장할 무렵에는 이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리유는 하늘에 있는 물체보다 지구가 비천하고 하등하기 때문에 불활성이며 움직일 수 없다는 지구중심설의 사상적 근거가 타파되였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지구도 움직일 수 있으며 달보다 더 밝게 빛날 수 있고 세계의 밑바닥에 버려진 더러운 쓰레기는 아니다.”라고 10년 후에 말했던 갈릴레이로부터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길버트의 자기철학은 코페르니쿠스적 사고관념과 근대적인 물리학적, 동력학적 우주론의 중간 역할을 했다. 과학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길버트의 론에는 한가지 근대적이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근대 물리학의 법칙은 정량적 측정으로 뒤받침되고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여야 하는데 길버트에게는 그런 방향성과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석에 관하여》에서 단 하나의 측정치도 기록돼있지 않다는 점에서 길버트의 리론은 전혀 수학적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길버트가 과학의 틀을 잡아가며 진정한 과학자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전에는 주로 신비주의자들이 과학의 연구를 이어갔다. 그들은 단지 관찰과 기록으로 이미 있는 사실을 밝힌 것에 불과하다. 또 과학보다는 신비주의적인 것, 례를 들어 륙각형, 오각형, 사각형의 조화, 점성술 등 현재로 봤을 때는 비과학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여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길버트는 그러한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에 빠지지 않고,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적인 생각들을 모두 자신만의 실험적 방법으로 반박했다.

길버트가 《자석에 관하여》에 담은 내용들을 전기학 혹은 자기학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들은 아니다. 하지만 길버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기와 자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였고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체계적인 실험방식들을 이어받아 더욱더 전기와 자기 분야를 발전시키게 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녀왕은 과학에 관심이 많아 윌리엄 길버트 과학 실험을 좋아했다. 그는 전기와 자기의 신비한 인력을 항해사이며 탐험가들에게 보여주었다. 항해가들은 영국 선박의 속도와 신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히 자성과 라침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1603년 3월 녀왕이 사망했고 그해 11월 윌리엄도 사망했다.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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