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版
현재위치:페이지-과학-맑고 깨끗한 음질 FM 발명한 라지오의 아버지
 
맑고 깨끗한 음질 FM 발명한 라지오의 아버지
 
발포인:김혜숙 발포시간:2019-06-10 클릭:

세상을 바꾼 인물-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

2019-06-04 15:13:07

image.png

"흔히 AM을 표준방송이라고 부르고 FM을 음악방송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FM은 음질이 빼여나다. 이 FM의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암스트롱이다."


image.png


미국 뉴욕에서 태여나 콜롬비아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에드윈 암스트롱은 곧 초기 방송 기술 혁신의 업적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선 라지오 신호의 증폭 기술 발달에 기여했다.

1920년대 미국, 당시에는 AM라지오가 처음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AM은 잡음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암스트롱은 어려서부터 라지오 잡음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잡음이 없는 라지오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매달린지 21년만인 1933년 FM 라지오 수신기를 발명했다.

암스트롱은 1935년 11월 미국 무선공학자협회에서 자신의 수신기를 대중 앞에 선보인데 이어 RCA와 NBC의 대표를 맡고 있던 데이비드 사노프에게 본인이 발명한 수신기를 가져간다. 이들 둘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초기 라지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정립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TV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노프는 이때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기존의 AM 방식에 비해 기술적으로 명백한 우위에 있던 FM 라지오의 채택을 거부한 것이다. RCA는 이미 더욱 저렴한 AM 라지오 수신기의 일반 보급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FM이 우수한 방식임을 확신했다. 그는 1935년 11월 5일, 미국 라지오기술자학회를 찾아가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는데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깨끗한 음질의 소리가 들려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날이 바로 FM 라지오가 성공적으로 첫 전파를 탄 날이다.

파산 상태에 있던 디 포리스트에게 사실상 얻을 것 없는 소송을 제기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던 암스트롱, 그는 RCA의 거절에 굴하지 않고 미국 련방통신위원회를 설득해 42~29MHz의 주파수 대역을 FM 라지오 방송용으로 할당받는다. 더 나아가 암스트롱은 30만 딸라의 거금을 들여 직접 FM 라지오 방송국을 설립하고 지역 FM 방송망을 지원했다. 이미 슈퍼헤테로다인 회로 등을 개발해 특허권으로 백만장자가 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립된 군소 방송사들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FM 방송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FM 단말기의 수요도 급증했다.

그러나 뒤늦게 FM 방송의 우수성을 발견한 RCA의 대응이 문제였다. 암스트롱에게 100만 딸라의 특허료를 제공하겠다고 나섰으나 암스트롱은 FM의 보급에 함께 힘쓴 방송사들을 위해 저작권료를 요구했다. 분쟁이 가열되려던 찰나 발생한 2차 세계대전이 암스트롱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전쟁 중 저작권료 없이 그의 FM 기술이 활용됨에 따라 RCA는 암스트롱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고 직접 별도의 FM 수신기를 개발했다.

1945년 미련방 통신위원회에서는 주파수 할당을 위한 회의가 열렸고 암스트롱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이날 회의는 기존의 주파수 대역을 텔레비죤 방송에 내주었고 FM라지오는 다른 주파수 대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암스트롱에게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그 배후에는 사노프가 있었다. 처음에는 AM라지오를 지키기 위해 FM의 보급을 막았고 또 FM라지오가 대중화되자 FM기술을 RCA에서 만들었다고 우기기까지 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암스트롱의 FM방송국은 문을 닫았고 사노프로부터 배신을 당한 암스트롱은 1949년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지만 암스트롱은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한 채 1953년 특허가 만료되고 말았다.

기술은 물론, 우정까지 잃어버린 암스트롱은 결국 1954년 집에서 자살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사노프의 텔레비죤방송국이 개국하는 날이였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친구이자 한 발명가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노프에게 비난의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암스트롱의 후손들은 사노프의 만행을 참지 못하고 RCA를 상대로 다시 특허권 소송을 제기했고 암스트롱이 그동안 써놓은 연구일지가 결정적인 증거자료로 되여 법정에서는 결국 암스트롱의 손을 들어주게 되였다.

암스트롱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기술자였지만 불행한 삶을 살았다. 오늘날 방송과 IT 기술의 모태가 된 초창기 무선 통신의 핵심 기술을 개발해 30대 초반에 백만장자가 됐지만 법정 소송으로 경제적 리익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그는 평생 기술 개발에만 힘썼다. 생각의 틀을 바꿈으로써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FM 기술을 개발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외고집이 방송사에서 진정한 혁신을 이뤄냈다고 볼 수 있다. 암스트롱은 기업을 운영한 적이 없지만 무선 통신의 력사에 RCA보다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조국을 위해 그의 특허 기술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소송전에 휘말린 것은 개인적인 리익을 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개발한 기술이 개인이 가지기엔 너무 큰 가치를 가진 것이였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은 방송 기술에서 진정한 과학자의 롤 모델을 보여 준다.

종합


인쇄 | 창닫기
1600*900화소、IE8.0이상 브라우저를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소유:연변도서관 Yan Bian library Copyright 저작권소유
주소:길림성 연길시 문화거리 399 호
吉ICP备07003547号-1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5号
근무시간:여름 8시 30-17:00, 겨울 8시 30-3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