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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힘으로 우뚝 선 프랑스 녀성 수학자
 
발포인:김혜숙 발포시간:2019-08-01 클릭:

2019-07-31 08:41:13

에펠탑이 세워질 때 당대 위대한 프랑스 과학자 수학자 72명의 이름이 새겨졌는데

탄성체의 진동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르맹의 이름은 없었다.


르블랑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소피라는 녀성인 줄 알게 된 가우스는 깜짝 놀라면서 “그녀야말로 가장 숭고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소피 제르맹은 1776년에 프랑스 빠리에서 태여났다. 류달리 수줍음을 많이 탔던 소피는 정치와 돈에만 매달려있는 가족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서재는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소피의 부모는 딸이 상류층 녀성에게 필요한 교양은 익히지 않고 하잘것없는 과학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소피는 부모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서재에 있는 모든 수학책을 꼼꼼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피가 19살이 되였을 때 프랑스에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최고 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이 설립되였다. 당시의 다른 고등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에콜 폴리테크닉은 녀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소피는 여러 교수의 강의 노트를 부지런히 모아서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에 에콜 폴리테크닉은 학생 자신이 공부한 것을 학기말에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하는 새로운 교육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소피는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남학생인 르블랑의 이름으로 과제물을 제출했다. 그 과제물의 독창성에 깜짝 놀란 라그랑주는 르블랑을 찾으려고 수소문한 끝에 그가 소피 제르맹이라는 젊은 녀성임을 알았다.

1798년 프랑스의 수학자인 르장드르 《수론》을 출간했다. 소피는 《수론》을 자세히 읽은 뒤 그 책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를 르장드르에게 보냈다. 그 후 소피와 르장드르 사이의 서신 교환은 끊임없이 계속되여 그 분량이 책 몇권에 달할 정도였다. 르장드르는 소피를 사실상의 공동연구자라 생각하게 되였고 《수론》 2판을 찍을 때에는 그녀가 발견한 사실을 부록에 실어주었다.

남성중심의 과학자 사회는 녀성인 소피에게 공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가진 높은 벽을 절실히 느끼면서 녀성 수학자의 길을 쓸쓸히 걷고 있었다.

소피 제르맹.


1801년, ‘수학의 황제’로 불리는 독일의 가우스가 《산술연구》를 출간했다. 1804년에 소피는 그 책을 여러번 읽은 후에 몇가지 자신의 생각을 담은 편지를 가우스에게 보냈다. 그때도 소피는 르블랑이라는 가짜이름을 사용했다. 이를 계기로 가우스는 소피의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였고 두 사람은 편지로 수학에 관한 폭넓은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가우스가 소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프러시아 전쟁 덕분이였다. 전쟁으로 가우스가 살고 있던 지역이 위험에 처하자 소피는 가우스가 아르키메데스처럼 죽음을 당할가 념려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친척이였던 페르네티 장군에게 가우스를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페르네티 장군의 군대가 가우스 집 근처를 장악했을 때, 친절하게도 장군은 가우스의 집에 밀사를 파견했다. 르블랑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소피라는 녀성인 줄 알게 된 가우스는 깜짝 놀라면서 “그녀야말로 가장 숭고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1808년에 소피는 페르마의 정리에서 n=5인 경우를 다루면서 가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가우스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이에 따라 소피와 가우스의 편지 교환은 5년으로 끝났다. 그것은 당시에 가우스가 괴팅겐대학의 천문학 교수로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수론 분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였다. 소피의 연구 성과는 계속 묻혀있다가 1823년에 라그랑주가 그녀의 제안에 립각해 n=5인 경우의 페르마 정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소피는 n이 100보다 작은 홀수인 소수(素數)라면, xⁿ+yⁿ=zⁿ의 해는 n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정수중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수학자로서의 이름을 널리 떨쳤다.

가장자리를 바이올린의 활로 문지르면 도형이 생긴다.


19세기초에 독일의 물리학자인 클라드니는 유리판에 가는 모래를 뿌린 후 진동을 일으키면 모래가 특정한 마디를 중심으로 대칭 무늬를 나타낸다는 실험을 했다. 나뽈레옹은 그 실험을 리론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제안했고 과학아카데미는 이 현상에 대한 수학적 리론을 공모했다.

소피는 이 문제에 도전했지만 자료를 수집하거나 당대의 수학자들과 토론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녀가 연구소나 학교를 방문하려고 하면 “남편과 함께 오시오.”라는 말과 함께 딱지를 맞았다.

적당한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공개 경쟁시험은 연장되였다. 소피의 가장 큰 경쟁자는 프랑스 과학계의 차세대 기수였던 푸아송이였다. 그는 소피의 연구 성과를 뉴턴의 립자설과 라그랑주의 방정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에 소피는 푸아송의 어설픈 가정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방정식으로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1816년에 시험평가단은  “녀성에게 상을 줄 수 있느냐.”하는 문제로 한참 론난을 벌이다가 결국 소피의 론문인  <탄성체의 진동에 관한 연구>를 대상 작품으로 선정했다.

덕분에 소피는 과학아카데미의 회합에 참석할 수 있는 최초의 녀성이 되였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수학자들의 모임에 초청되여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영광도 누렸다.

1820년대에 들어와 소피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교화하고 그것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여기에는 탄성체 표면의 성질에 관한 론문, 탄성체 표면에 대한 문제의 해결에 적용되는 해석학 원리에 관한 론문, 탄성체 표면의 곡률에 관한 론문 등이 포함되여있다. 이상의 연구 성과들은 1830년에 《표면 곡선에 관한 연구》로 출판되였다. 소피의 마지막 론문은 1831년에 출간되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가장 독창적인 연구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평균 곡률의 개념을 담고 있다.

1831년에 소피는 괴팅겐대학의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직전에 유방암으로 인해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오늘날 소피 제르맹은 프랑스에서 국민적인 추앙을 받는 수학천재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 빠리에는 소피 제르맹 거리가 조성되여있으며, 에콜 소피 제르맹이라는 학교도 설립되여있다. 그녀는 녀성 과학자를 거의 용납하지 않았던 당시의 과학자 사회에서 거의 혼자의 힘으로 우뚝 선 존재였다.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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