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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인물-튀코 브라헤 력사상 최고의 육안 관측 천문학자
 
발포인:김혜숙 발포시간:2019-08-22 클릭:

2019-08-14 08:34:25

튀코 브라헤는 천문학의 력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맨눈으로 가장 정밀한 천문 관측을 남긴 귀족 출신의 천문학자로 잘 알려져있다.

튀코 브라헤는 1546년에 단마르크의 스코네에서 오토 브라헤의 맏이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으로 단마르크 왕실에서 중요한 사람이였다.

어린시절에 튀코는 양아버지인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큰아버지는 정부에 있는 그의 자리를 튀코에게 물려주려고 했고 튀코는 대학에서 큰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튀코는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1560년 8월 21일에 있던 일식이 예측되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그는 천체의 추산 위치표와 천문학 책들을 구매한 뒤에 다른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천문학을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는 튀코가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은 그의 뜻을 꺾지 못하고 천문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미 대학시절에 튀코는 가장 정확한 기구를 리용해서 매일 밤마다 체계적이고 엄격한 관찰을 해야만 천문학이 발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교훈이 되였다. 튀코는 평생 현존하던 기기들을 개선하고 확장시켰고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570년에 그는 천문 관측 장비인 사분의를 개량해서 엄청난 크기의 기기를 만들었고 그 뒤에는 직경 12메터짜리 륙분의를 제작했다. 이런 장치들은 별의 위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 관측했던 최고의 육안 천문학자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 육안 천문학자였다. 망원경은 튀코가 죽은 직후인 1609년에 발명되여 이후 천문학자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관측 도구가 되였다.

튀코는 불같은 성격과 기행으로 유명하다. 1566년, 그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그는 사촌과 수학 공식을 놓고 누가 옳은가를 다투다가 결론에 이르지 못하자 결투를 감행했고 튀코는 그의 코날을 잃었다. 이 사건 이후에 튀코는 평생 은이나 금, 혹은 다른 합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는데 자신의 가짜 코를 가장 편안하게 만들 수 있는 금속을 찾다가 의학과 연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는 해석도 있다. 튀코의 무덤은 두번 발굴되였는데 1901년에 첫번째로 무덤이 발굴되였을 때 연구자들은 그의 해골에 록색 자국이 보인 것을 두고 이것이 구리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추측했다. 2010년에 다시 무덤이 발굴되였을 때는 코뼈의 일부를 화학적으로 분석했고 이로부터 튀코의 코가 황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1580년대 경에는 튀코가 단마르크 전체의 약 1%에 해당하는 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부자였다. 튀코는 자신의 성에 사람들을 불러서 모임과 파티를 즐겼는데, 이때 자신이 애완동물로 돌보는 순록을 종종 선보였다.

1572년 11월 11일에 튀코는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예상치 않게 나타난 굉장히 밝은 별을 관찰했다. 초신성을 보고한 뒤에 튀코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졌다. 단마르크의 왕 프레데릭 2세는 성공한 과학자를 곁에 두고싶어했고 튀코에게 벤이라는 섬을 하사하고 여기에 관측소를 세우는 것을 지원했다.

튀코 브라헤의 제2관측소.


튀코는 1576년에 관측소인 우라니보르를 벤 섬에 세웠는데 이 관측소 지하에는 자신의 연금술 실험을 위한 실험실도 함께 세웠다. 이 관측소는 유럽 최대의 규모였고 비싸고 정밀한 천문 관측 장비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우라니보르는 일종의 연구소 같은 것으로 약 100명의 학생과 장인들이 1576년부터 1597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우라니보르에서 그가 사용한 기구들은 《복원된 천문학을 위한 도구들》이라는 그의 책에 자세히 설명되여있다. 튀코는 1581년에 우라니보르의 관측이 바람이나 땅의 진동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지하에 스티에르네보르라는 새 관측소를 우라니보르 옆에 짓기도 했다. 그의 거대한 관측소는 단마르크를 방문한 다른 나라의 주요 인사들이 한번씩 찾아오는 곳이 되였을 정도로 명물이 되였다.

우라니보르의 내부.


1577년에 튀코는 혜성을 관찰하고 이것이 달 아래의 현상이 아니라 달 우의 현상임을 보아냄으로써 또 다시 유명세를 얻었다. 1588년에 그의 후원자였던 프레데릭 2세가 사망했고 그 해 튀코는 자신의 천문학 관측과 자신의 천문 체계를 집대성한 《새로운 천문학 서설》을 출판했다.

튀코는 천문 관측에서 여러 혁신을 이루었다. 례를 들어 천체들은 대기의 굴절 때문에 수평선 근처 우에서는 실제보다 더 높은 고도로 관측되는데 튀코는 대기의 굴절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바로잡은 최초의 관측표를 만들어 사용한 천문학자였다. 튀코의 죽음 이후 케플러는 그의 화성에 관한 관측 기록을 리용해서 행성의 타원 운동 법칙을 추론했다. 이 법칙들을 적용함으로써 케플러는 그 이전보다 더 정확한 천문 관측표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루돌핀 표》로 출판했다. 이 정확한 표는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튀코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매우 우아하고 과거의 지구중심설에 비해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체계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신 튀코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돌지만 다른 모든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혼종적인 체계를 제창했다. 이 체계에서 태양과 지구 주위를 공전하지만 다른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공전했다. 그의 체계는 이전의 모델들에는 불만을 가졌으나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천문학자들에게 안전한 대안을 제공했다.

튀코는 죽는 순간도 남달랐다. 그는 1601년 10월의 한 만찬에서 례절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화장실에 가는 것을 참았는데 집에 돌아온 뒤에 더 이상 소변을 볼 수 없게 되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다가 며칠 뒤에 사망했다. 21세기에 이루어진 검사 결과 튀코는 방광이 터져서 죽었을 것으로 확인되였다.

튀코 브라헤는 스스로가 자신의 묘비명을 작성했다. ‘현명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고.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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