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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두번 받은과학영웅의 몰락
 
발포인:김혜숙 발포시간:2022-06-07 클릭:

2022-06-02 08:51:52

과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중에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노벨상을 받게 된다. 아무리 뛰여난 업적을 남겼더라도 운이 좋지 않아 일찍 사망하거나 충분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시상위원회가 뽑는 분야당 3명의 후보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결코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 노벨상의 기준에는 분야당 3명이라는 철저한 제한은 있지만 한 사람이 여러번 수상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없다.

지금까지 4명의 과학자가 노벨상을 두번 수상했다. 마리 큐리, 존 바딘, 프레데릭 생어, 라이너스 폴링이다. 그리고 오직 라이너스 폴링만이 한번은 노벨과학상을 또 한번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즉 라이너스 폴링은 과학자로서도 사회적 지식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 진정한 과학계의 영웅으로 기억될 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과학과 사회운동 모두 성공

폴링은 1901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가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해가 1954년, 노벨평화상은 1963년이니 겨우 60대 초반에 두개의 노벨상을 거머쥔 과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된 셈이다. 어린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폴링은 기계공장에 직공으로 취직해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고 학생훈련병 프로그램으로 겨우 농업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후 어렵게 대학원에 진학한 후부터 폴링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물리학과 수학을 부전공으로 화학을 주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그는 구겐하임장학재단의 도움으로 당시 량자력학의 메카였던 독일에서 좀머펠트, 슈뢰딩거, 막스 보른,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등과 교류하며 이미 젊은 시절 엘리트 과학자의 코스를 밟아나갔다.

그가 탐닉했던 분야는 분자의 구조를 량자력학적 원리로 풀어내는 것이였고 당시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X선 회절 등의 방법을 통해 이후 생화학의 토대가 되는 여러 원리들을 발견했고 헤모글로빈과 같은 단백질 분자의 작동원리를 밝혀내기도 했다. 1940년대말 폴링의 연구는 유전병인 겸상적혈구 빈혈증의 발생원리를 헤모글로빈 분자의 돌연변이로 설명하고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해 생물학계를 뒤흔들기도 했다.

폴링은 1946년부터 반전반핵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폴링은 부인인 에바와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을 알리는 데 헌신했고 195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란드 러셀이 주축이 되여 발표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서명한 11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선언의 영향으로 1957년엔 ‘과학과 세계의 분쟁에 관한 퍼그워시회의’가 개최되였다.


◆비타민C에 극단적 집착

폴링은 18세기 라브와지에가 완성한 화학혁명 이래 화학분야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으며 분자생물학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위대한 과학자임과 동시에 전세계 인류를 위한 반전운동과 반핵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던 한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하지만 폴링이 말년에 비타민C가 암을 비롯한 대부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극단적이고 검증되지 않는 주장으로 제도권 과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대체의학 진영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는 등의 일탈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 폴링의 인생에서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화학분야의 혁신이나 반핵반전시위보다는 비타민C를 둘러싼 한 과학영웅의 추락이 아닐가 싶다. 비타민C에 대한 리론에서 폴링은 철저히 과학적 근거에 기대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그의 과학적 성공과 경험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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